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엘가 (문단 편집) == 개요 == [[영국]]의 [[작곡가]]. [[낭만주의]] 또는 넓은 의미의 [[국민악파]] 작곡가로 분류된다. [[잉글랜드]]의 [[우스터]] 근처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며 피아노 조율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며 성년이 된 엘가도 가톨릭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했다. 그 사이 아버지의 권유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가 영국 왕실의 요청으로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의 제2국가로 자리매김했으며 메리트 훈장과 빅토리아 여왕 훈장을 받았다. 영국의 고전음악 작곡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일반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영국에서 활동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으나, [[독일]] 태생이다.] 우리에겐 [[위풍당당 행진곡]]과 사랑의 인사[* [[컬러링 베이비 7공주]]의 러브송이 이 곡에 가사를 붙이고 편곡한 것이며, [[씨야]]의 동명의 곡에도 샘플링되어 있다. 신기한 건 두 그룹 모두 슈가맨에 출연해 레전드를 찍었다. 거기다가 두 팀 모두 희열팀으로 배정되었다.]로 알려진 영국의 클래식 음악가이다. 영국은 [[헨리 퍼셀]](1659-1695)이 요절한 후로는 200년 넘게 유명한 영국 출신 음악가가 없어서[* 그나마(?) 르네상스음악 시기에는 영국에도 탤리스(Thomas Tallis), 버드(William Byrd), 다울런드(John Dowland) 같은 [[네임드]]들이 있었다.] 그 시대 영국인들도 당황스러워할 정도였는데 드디어 20세기를 시작하며 200년만에 나타난 대작곡가이다. 엘가를 시작으로 본 윌리엄스, [[벤저민 브리튼]] 등의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누리는 작곡가들이 등장했고[* [[God Save the King|영국 국가]] 편곡 중 가장 인기가 많은 버전들이 [[에드워드 엘가]]와 [[벤저민 브리튼]]이 각각 편곡한 것들이다.], 덕분에 20세기의 영국 고전음악은 중흥기였다고 평가받는 편이다. 노년기에는 회의론자가 되긴 했지만, 장년기까지 독실한 가톨릭 신도로서 반가톨릭 정서가 강했던 당시 영국에선 성공이 쉽지 않던 소수계층이었으며, 40살 넘게까지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였다. 하지만 1899년에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 위풍당당 행진곡, 교향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타석으로 당시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대박이 나서 영국에서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는 [[슈퍼스타]]와 같은 인기와 관심을 받기도 했다. 다만 1918년 이후에는 낭만적의 정점을 달리는 엘가의 작품들은 당시 치고 올라오던 다른 젊은 영국 작곡가나 시벨리우스에 밀려 예전만큼의 인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교향곡 2번과 첼로 협주곡은 유명하고 현재도 연주를 많이 하는 편. [[파운드 스털링#s-6.6.2|영국 20파운드]]에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150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인 2007년 3월 13일 [[애덤 스미스]]와 교체당했다. 때문에 에드워드 엘가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단체들이 --[[무슨 지거리야|이게 무슨 지거리야]]-- 허탈해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렇게 지폐에서 하차하게 된 이유는 얼굴 도안이 너무 [[위조]]하기 쉬워서였다고(...) 소설 [[멋진 징조들]]에서 살짝 놀림감이 된 적이 있다. 천사인 [[아지라파엘]]과 악마인 [[크롤리]]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크롤리가 "우리 지옥에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 등등이 있지. 너희 천국에는 엘가와 [[프란츠 리스트|리스트]] 뿐이잖아? 엘가의 곡과 함께 영원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말이 되냐?"라며 신나게 깐다. 이에 아지라파엘은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지 뭐......"라고 얼버무리는데 사실상 크롤리의 주장에 손을 든 격. 아내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결혼 후 캐롤라인 앨리스 엘가)와의 러브스토리도 유명하다. 엘가가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가난하게 살던 시절, 귀족(육군 중장)의 딸인 연상의 여성 앨리스가 피아노 제자로 들어왔다. 앨리스는 엘가의 재능과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응원했으며 이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의 배경이 너무나 크게 차이났기에[* 엘가는 평민 출신에 빈곤했고 가톨릭 신자였던 반면 앨리스는 귀공녀 엘리트였고 개신교 신자였다.] 앨리스의 가족들은 둘의 관계를 극렬히 반대하였으나, 두 사람은 굴하지 않고 결국 자기들끼리 약혼을 했다. 이 때 엘가가 앨리스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담아 지어 헌정한 곡이 우리에게 7공주의 러브송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곡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1888)'이다.[* 사랑의 인사 악보에는 'à Carice' 라는 헌사가 적혀 있다고 한다. 아내의 이름 캐롤라인 앨리스('''Car'''oline Al'''ice''')를 줄인 애칭. 1890년 엘가 부부의 외동딸이 태어났는데, 부부는 이 딸의 이름도 Carice라고 지었다.][* 앨리스가 독일어를 잘 해서 엘가도 원래는 독일어로 Liebesgruss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출판 시 출판사에서 임의로 프랑스어로 제목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앨리스는 '바람부는 새벽(The Wind at Dawn)'이라는 자작시를 지어 화답했다고 한다. 이듬해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했고, 이후로도 엘가는 앨리스의 내조를 받으며 수많은 명곡을 지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1920년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슬픔에 빠진 엘가는 앨리스의 죽음 이후 한동안 작곡을 하지 않았다. 도라벨라 암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해독이 안 되었다.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본인 지휘의 녹음도 꽤 남겼는데 EMI(현 워너뮤직)에서 이 녹음들을 묶어 CD 9장 분량의 [[https://www.amazon.co.uk/Complete-Electrical-Recordings-Edward-Elgar/dp/B004MSRDK6|전집]]을 발매한 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